김대중의 평민당이 주도한 광주청문회 중 초기청문회였던 1988년 11월 30일 청문회를 잘 관찰하면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고, 시청자들에게 혼동을 줄 목적으로 편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12.12사태의 당사자 정승화씨가 광주사태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려는 꼼수였으며, 김대중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단서는 그들의 숨기고 있었던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이었다. 그날 평민당이 출석시킨 정기용 씨를 정기용 씨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담당 군 검찰관으로 출석시키고 심문함으로써 시청자에게 두가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를 주도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둘째로,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오백 만원을 준 혐의로 사형이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5.18기만자들이 연출한 쇼였으며, 진실에 있어서 전두환 장군은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임기는 1980년 4월에 끝났으며, 6월에 후임자 노태우에게 인수인계함으로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7월 김대중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은 광주사태 때문이 아니라, 김대중이 한
▒ 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 명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제목의 그의 저서에서 강명도는 광주사태 당시까지만 해도 전두환은 전혀 북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238쪽, 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5.18측 및 유언비어에 편승하는 미디어는 마치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유명 인물이었던 것처럼 착각하도록 유도해 왔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남한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고급 정보를 갖고 있었던 강명도가 모를 리 있었을까? 정치 시사 분야의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던 김동길 교수조차도 1980년 6월 이전에는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계엄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았을까? 그 사실이 궁금하여 역사학도는 2007.07.11 13:05 에 한동석 중위에게 다음과같이 질문하였다:이 질문에 대해 2007.07.11 15:47 에 한동석 중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그러면 폭동진압작전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12.12사태에 대하여 거짓말한 정승화와 양김씨 쉴새없이 나불거리는 노무현의 입과 달리 최규하 대통령의 입은 문자 그대로 자물통이었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끝까지 침묵하심으로 던진 메시지는 12.12사태는 엄정중립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12.12사태는 결코 흑백논리로 재단하여 어느 한편이 절대적으로 옳고 어느 한편이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당신의 입으로는 당대의 인물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다. 12.12사태 역시 518픽션소설가들에 의해 아주 잘못 알려져온 사건들 중 하나이다. 518픽션소설가들이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흔히 제시하는 주장이 5.18은 12.12사태에 항거한 사건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들의 두가지 무식을 드러낸다. 첫째, 12.12사태라는 표현은 본래 김재규 부하들이 불법으로 군대를 동원한 사태를 지칭하기 위해 씌어진 표현이었다. 둘째, 대다수의 국민은 1987년 11월 이전에는 12.12사태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었다. 아래 동영상에서 우리는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말기였던 1987년 11월에 들어서야 국민이 비로서 12.12사태
흔히 1987년에 6공화국 헌법이 제정된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우리가 보는 것은 6공화국 헌법 때문에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공화국 헌법이란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제로 개정한 헌법을 일컫는다. 그러나, 작금의 광우사태도 5년 단임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한 예이다. 분명 노무현은 작년까지만 해도 한미FTA 체결에 온 힘을 쏟았으며, 몇번이나 부시 대통령에게 쇠고기 수입을 문서화하겠다는 확약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 패배하자마자 노무현의 태도가 싹 변하여 한미FTA 체결 방해꾼이 되었으며, 손학규 등 노무현 정권 당시 한미FTA 체결을 위해 뛰었던 정치인들이 금방 철새가 되어 광우사태를 선동하였다. 통상 한 국가 건국기를 50년 내지 100년으로 본다. 그리고, 건국기에는 장기적인 안목의 경제정책이 필요하다. 5년마다 경제 정책이 요동치듯 바뀌어서는 도저히 장기적인 경제 정책이 불가능하다. 대만도 싱가폴도 수십 년 안목의 장기적인 경제정책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던 국가들이었으며, 쟝개석 총통의 총통제라 불리지는 않지만 건국 130년이 지난 미국에서도 경제 대통령 루
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의 미국 문화원 건물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1시간 만에 진화됐지만 그 불로 1층 도서관 열람실에 있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김미숙 등 3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범인은 광주사태 주동자였던 김현장의 선동을 받은 문부식 등 고신대생 학생들이었다. 아래 동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어 1985년 5월 22일에도 서울의 미국 문화원이 강제 점거된 사건이 있었다.이처럼 1980년대에 수차례 있었던 미국문화원 방화 및 점거사건의 동인은 미국은 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이었는가? 하는 의문이요, 미국이 5.18광주시민군을 배신하였다는 분노감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미국은 5.18광주시민군과 별 우호적 관계도 적대적 관계도 아니었다. 단지, 광주시민들이 5.18사기꾼들에게 속았을 뿐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80년 5월 22일경부터 5.18사기꾼들이 유포한 대자보로 거슬러올라간다. 미 7함대의 항공모함에 대한 유언비어가 적힌 이 대자보에 대해 이법철 스님은 이렇게 서술한다:광주거리의 도처에는 벽보의 대자보(大字報)가 시민군을 독려하고 있었다
조총련이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공작을 하였을 때 위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는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하였던바, 바로 KBS가 푸른 눈의 목격자라 부르는 독일인 기자이다. 그가 촬영한 영상물은 지난 27년간 518유언비어 확산에 이용되어 왔던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영상물이 5.18논리의 급소를 찌르며, 5.18측 주장의 근거를 와르르 무너뜨린다. 광주사태 증거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군의 무장시점이다. 본래 시민군이란 미국의 참전을 막고 월남을 적화하는 방법으로 1975년 월맹군이 중부 다낭에 설치한 것으로 인민혁명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월남의 인민혁명당과 남한의 인혁당(인민혁명당)은 1975년에 같은 박자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광주시민군이 다낭시민군의 한국판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만약 월남을 패망시키기 위해 공산세력이 창군한 시민군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면 시민 무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518측에서 광주폭동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할 때에 가장 큰 장애물이 민간인이 총기 무장한 사실이다. 그래서, 5.18논리는 총기 무장 시점을 최대로 늦추며 5월 21일 집단
김대중의 평민당이 주도한 광주청문회 중 초기청문회였던 1988년 11월 30일 청문회를 잘 관찰하면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고, 시청자들에게 혼동을 줄 목적으로 편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12.12사태의 당사자 정승화씨가 광주사태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려는 꼼수였으며, 김대중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단서는 그들의 숨기고 있었던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이었다.그날 평민당이 출석시킨 정기용 씨를 정기용 씨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담당 군 검찰관으로 출석시키고 심문함으로써 시청자에게 두가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를 주도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둘째로,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오백 만원을 준 혐의로 사형이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5.18사기꾼들이 연출한 쇼였으며, 진실에 있어서 전두환 장군은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그의 보안사령관 임기는 1980년 4월에 끝났으며, 6월에 후임자 노태우에게 인수인계함으로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7월 김대중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은 광주사태 때문이 아니라, 김대중이 한민통이란
5.18사기꾼들이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때 과연 그들은 확인된 객관적 사실을 말하였는가 아니면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는가? 5.18사기꾼들이 전두환이 광주에서 오천 명을 죽였다고 말하였을 때 과연 그들은 그들이 본 사실을 말하였는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와 관련하여 진실은 5.18광주시민군 중 그 누구도 전두환이 누군지 알지 못하였다. 전두환의 얼굴은커녕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으며, 전두환이란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었으며,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도 광주사태 당시 광주를 방문하신 적이 없으셨다. 1989년 광주청문회가 끝난 후 5.18측이 시민군 증언을 채증하였을 때 시민군 이수범은 우리는 전두환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몰랐는데 항쟁이 끝나고 나니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다.고 증언하였다 (http://cafe.daum.net/518cafe/8Xu0/37). 시민군 최진영도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고 증언하였다. 시민군 김행주도 5·18
> 지금부터 41년 전이었던 1967년 11월 17일자의 위의 대한뉴스 동영상과 아래의 사진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본다.멀리 내다 보시고 고속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시는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김대중은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드러누워 경부 고속도로 건설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오늘날에는 심지어 5.18사기꾼들조차 김대중의 그 짓이 잘한 짓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때만 해도 김대중의 그런 미련한 선동구호에 속아넘어간 이들이 많아서 김대중은 불과 4년만인 1971년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다. 김대중이 경부 고속도로를 반대한지 꼭 30년만에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다시 2년 지나 내놓은 대북정책이 바로 햇볕정책이라는 것이었는데, 김일성이 1967년 김대중을 국회의원 만들어 주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은 두더지 전략이었다.광주사태에 대한 진실 중의 하나는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도 김대중도 광주에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었다는 사실이다.전두환이란 이름은 폭동 주동자들이 외치는 구호로 생전 처음 들었고,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기껏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을 뿐이었지 광주인들이 김대중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질 만큼
▲사진설명: 1988년 12월 7일 광주청문회 때 민주정의당 이긍규 의원에 대한 답변으로 정호영 증인이 광주사태 강경 진압 명령자는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었음을 증언하는 모습.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한 것도 광주사람 정웅 소장의 독단적인 행위였고, 경찰 병력으로는 안되니 너희가 시위를 진압하라며 강경 진압 명령을 공수부대 대대장들에게 내린 이도 정웅 소장이었다는 정호영 증인의 증언이 있었다.광주사태가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 5월 22일부터였다. 사실 그 전에는 80만 시민 광주시민들도 금남로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타지역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1980년 5월 22일 서울대 운동권이 전국에 퍼뜨린 유언비어는 오천 명이 학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월 22일 그 시점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광주사태 전 기간에 걸쳐 생긴 사망자는 그 당시 계엄사가 발표한 150 여명이 정확한 숫자였음이 김대중 정권 때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노태우 정권 때부터 광주사태 부상자들에게까지 수억원 이르는 보상을 누차해왔으니 김대중 정권 하에서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이 추가 신고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