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해방(1945) 후 3년째 되던 1948년에 세워졌으니, 올해 2008년은 건국 만 60주년이 된다. 사람으로 말하면 환갑(還甲)이 되는 셈이다. 퇴영(退嬰)의 시기였던 이조(李朝)末 나라가 일제(日帝)에 강탈당한 후, 36년 만에 연합군이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우리는 해방의 환희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소련군의 북한 점령으로 국토와 민족은 양단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자유민주 국가 건설의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남한 지역은 북한의 사주를 받는 찬탁ㆍ좌익 세력과 항일독립운동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은 반탁ㆍ우익 세력 간 정치권력 헤게모니를 위한 쟁탈의 장(場)으로 변모하였다. 해방 정국(政局)의 극도의 혼란 속에서 국가수립의 단초가 된 것은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1946년 6월 ‘정읍 발언’이다. 그는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천명함으로써, 혼돈의 해방 정국을 마감하고 건국(建國)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反통일 기도’라고 주장하는 것
북한이 핵문제와 관련, 미국과는 ‘직(直)거래’를 시도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도(度)를 넘는 ‘위협성 비방’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른 바 전형적인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의 일환이다. 성 김(Kim) 美국무부 한국과장에게 영변 核관련 자료를 넘기던 지난 8일, 북한은 한국에 대해 “군사적 긴장이 격화되면 충돌은 일어나게 되고 그것은 다시 제3의 서해교전, 제2의 6·25전쟁으로 번지게 될 것”이라는 과격한 대남 선동 군사논평을 내보냈다. 논평 제목도 “이명박 역도의 군사적 대결소동 진상 폭로”이고, 지난 5일의 “역도, 자주통일” 운운하며, “남조선 인민들은 반역도당을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서고 있다”는 선동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의 배경으로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북정책이 정상화(正常化)의 길로 들어서서 북한 핵ㆍ인권 문제에 대해 원칙(原則)을 갖고 임함에 따라, 그들에게 득(得)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 한 원인이겠으나, 부시행정부의 대북 협상 ‘조급증’도 또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북한이 이번에 미국 측에 넘긴 核자료가 신뢰성 있는 것인지는 앞으로 검
李명박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 부시대통령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갖고, 공동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상회담은 매우 친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됐으며, 예정 시간보다 20분 더 연장될 정도로 진지한 모습이었다는 소식이다. 한국에 보수ㆍ실용정권이 10년 만에 등장한 이후 처음 열린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는 크게 4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1)韓美동맹의 복원ㆍ강화ㆍ업그레이드 (2)對北 공조(共助)체제 구축 (3)韓美FTA 조기 비준 다짐 (4)세계문제에 공동대처 및 비자면제 등 현안 타결. 1. 韓美동맹의 복원ㆍ강화ㆍ업그레이드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韓美 관계의 복원ㆍ강화ㆍ업그레이드(upgrade)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盧무현 정권 때 합의한 주한미군 감축 스케쥴을 변경, 현 수준에서 동결키로 합의했으며, 미국으로부터의 무기구매 조건을 NATO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당초 올해 말까지 주한 미군 3천500명을 추가 감축한다는 계획을 백지화, 현재의 2만8천500명을 그대로 유지키로 했고, 대외군사판매차관(FMS) 조건도 최혜국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일본 수준에 준해 적용하기로 했다. 양